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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문학칼럼 52. 김연수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
송은정 작가 (문학박사)

지장보살의 눈물이 노랗고 빨갛고 파란 연등 아래 대웅전 마당으로 하얗고 붉고 푸른 빛과 뒤섞이며 맴돌았다. 그 둥근 빛이 아프지 말아라, 누구도 아프지 말아라 말하며 약지처럼 빙빙 돌면서 사람의 아픈 상처를 달래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196쪽)

모든 중생을 제도한 이후 자신이 가장 마지막에 성불하겠다는 지장보살에 대해 읽으며 가슴 어디쯤이 저릿하니 아렸지요. 지장보살의 원이 자비의 지극함보다는, 인간을 고해(苦海)에서 허우적거리게 하는 어떤 힘들에 대한 처절한 저항으로 여기는,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에 따른 것이었지요.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어 지은 죄고에 아파하는 것을 헤아리고, 온몸으로 중생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지옥문을 부순다는 육환장을 철렁이며 한 명 한 명의 구제를 기다릴 지장보살. 지장보살이란 이름에 제멋대로 고독한 투사의 형상을 투영한 게죠.

그런데 올 초봄 그 막연한 상상을 확 깨는 그림과 마주했습니다. 나무 위에 옻칠과 금분만으로 그려진 지장보살은 아이처럼 순하게 미소짓고 있더군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깨우침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만은 그 순간 제 마음을 볼 수 있는 거리가 생겨난 듯합니다.

김연수의 단편 소설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를 다시 읽으면서는 이 탱화 작가가 해석한 지장보살을 떠올리며 읽었고, 그랬더니 소설 속 인물들의 목소리가 그 이전과 다르게 들려옵니다. 지장보살의 육환장 소리가 맑아지고 왼손에 쥔 장상명주의 빛이 환히 스며드는 것처럼요.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는 연등이 내걸리는 초파일의 한 절을 중심 배경으로 ‘예정’과 ‘봉우’ 두 명의 서술자가 이끌어 가는 소설입니다. 절에 머물고 있는 ‘예정’과 그녀를 찾아가려 한밤중 길을 나선 방위군 ‘봉우’. 예정은 아이를 유산하고 명부전에서 수의 짓는 일을 하며 태어나지도 못한 갓난아이의 배냇저고리도 몰래 짓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 푸릇푸릇 젊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며 “어서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다고, 누구나 자신을 늙은이로만 봐줬으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봉우는 절에서 나오지 않겠다 말했던 예정을 찾아 밤중에 산을 넘어 절로 향합니다. 어둠 속에서 자신과 세계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음을, 그래서 자신과 이 세상 어느 것과도 연결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정에게 “아이는 어쩔 수 없었던 거야. 하지만 너는 아프지 않았으면, 니가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발.”이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예정을 눈여겨 보던 공양주 보살은 남편이 죽자 어물전을 물려받으면서 “살아생전 셀 수도 없이 많은 바다 짐승들의 숨통을 끊은 사람”이었고, 끝내 자신에게서 풍기는 썩은 내를 견딜 수 없어 공양주 보살이 된 사람이죠. 이 공양주 보살도 예정이 숨겨둔 배냇저고리를 찾아낸 후 말합니다. “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 “이제 그만 잊거라.”라고.

이 말에 당신도 예정처럼 눈물이 흐르는지…….

봉우는 어두운 산길에서 길을 헤매며 깨닫습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기는 아프지 않았을 줄 알았으니까 그런 말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중략) 봉우는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중략) 비로소 봉우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몸뚱어리까지만을 자신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의 산길에서 봉우는 매화나무이기도 했고 백송 가지이기도 했고 다래 열매이기도 했다. 봉우는 앞서 걸어가는 자신이기도 했고 자신의 뒤를 쫓은 뭔가이기도 했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이기도 했고 모든 죽은 존재이기도 했다. (중략) 봉우는 무서웠다. 자기도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오늘 같은 날도 과연 달이 뜰까?

소설가 김연수는 봉우의 밤길 깨달음과 지장보살 이야기를 더해 만물과 연결되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까요? 네가 아프다는 사실에 나 역시 아파지고, 네가 없으면 나 역시도 곧 사라질 것 같은 고통.

그걸 다른 각도로 본다면 내가 너무 아파하지 않아야 너도 덜 아파지고, 내가 미소 지어야 너도 미소지을 수 있을 터이니. 나를 보렴, 이렇게 평온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너에게 온 마음으로 연결되고 있잖니. 그러니 너 이제 그만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 전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래서 제가 본 그 나무판에 그려진 지장보살의 표정이 그러했던 것인지. 아프지 말라는 이가 지장보살이니, 내 아픔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미소짓고 있는 지장보살이니 위로가 되었던 게지요.

예정은 절 마당 높이 노란 연등을 달며, 떠나간 아이를 만날 수 없지만, 마음에는 늘 머물 것이란 걸 알지요. 예정은 아이와 봉우에 대한 사랑을 담아 달처럼 노란 연등을 드높이 내걸어 둡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는 봉우에게는 따뜻한 달로 뜨겠지요.

부처님 탄생하신 날, 연등 불빛은 눈물에 아롱지듯 번지면서 아프지 말아, 너무 많이 아파하지 말라고 먼 곳까지 빛을 보내주네요.

작품 – 이영희, 지장보살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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